찬드라굽타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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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찬드라굽타 1세는 쿠샨 왕조 쇠퇴 이후 북인도에서 부상한 굽타 왕조의 창시자이다. 그는 마가다 지역을 기반으로 릿차비족 공주 쿠마라데비와 결혼하여 지위를 강화하고 갠지스강 중류 지역을 정복하여 굽타 왕조를 건국, '마하라자디라자'(제왕 중의 대왕)를 칭했다. 320년을 굽타 기원으로 제정했다. 찬드라굽타 1세는 릿차비족 공주 쿠마라데비와 결혼하여 금화를 발행했으며, 동전에는 찬드라굽타 1세와 쿠마라데비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찬드라굽타 1세의 영토 범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칭호를 통해 이전 굽타 왕들의 영토보다 넓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들 사무드라굽타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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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드라굽타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칭호 | 마하라자디라자 |
재위 기간 | 기원후 319년 ~ 335년경 |
대관식 | 320년 2월 26일 |
이전 | 가톳카차 |
다음 | 사무드라굽타 |
배우자 | 쿠마라데비 |
자녀 | 사무드라굽타, 아마도 카차 |
왕조 | 굽타 왕조 |
가문 | 굽타 제국 |
아버지 | 가톳카차 |
종교 | 힌두교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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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찬드라굽타 1세는 파탈리푸트라의 굽타 가문 출신으로, 쿠샨 왕조가 쇠퇴한 후 마가다국(마간다국)이 있던 현재의 비하르 주에서 부상했다. 마우리아 왕조를 세운 찬드라굽타를 잇는다는 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석가모니와도 연관이 있는 릿차비족의 명문가 출신인 왕비 쿠마라 데비를 맞아들여 지위를 굳혔다. 갠지스강 중류 지역을 정복하고 북인도를 통일하여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굽타 왕조를 건국하고, 마하라자디라자 (제왕 중의 대왕)를 칭했다. 320년을 굽타 기원으로 제정하여 이후 북인도에서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왕조는 제2대 왕 사무드라굽타에게 계승되었다.
2. 1. 즉위와 통치
찬드라굽타 1세는 굽타 왕 가토르카차의 아들이자, 굽타 왕조의 창시자 굽타의 손자였다. 이들은 모두 알라하바드 석주 비문에서 '마하라자'(위대한 왕)라고 불렸다. 찬드라굽타 1세는 '마하라자디라자'(-------------- "왕 중의 왕")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금화를 발행했는데, 이는 그가 굽타 왕조의 첫 번째 제국 통치자였음을 시사한다.찬드라굽타 1세의 정확한 재위 기간은 불확실하다. 그는 ''마하라자디라자''라는 칭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가 굽타 달력 시대를 창시했으며, 이 시대의 기원이 그의 즉위식을 기념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V. A. Smith와 P. L. 굽타를 포함한 여러 역사가들은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여 찬드라굽타 1세의 즉위 시기를 서기 319~320년으로 추정하며, 이를 굽타 시대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추측일 뿐이며, 굽타 시대의 창시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찬드라굽타 1세는 아마도 오랜 기간 통치했을 것이며, 알라하바드 석주 비문은 그가 노년에 접어든 후 아들 사무드라굽타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음을 시사한다.
찬드라굽타 1세의 재위 기간에 대한 다양한 추정치는 다음과 같다.
역사가 | 재위 기간 추정치 |
---|---|
A. S. 알테카르 | 서기 305~325년 |
S. R. 고얄 | 서기 319~350년 |
Tej Ram Sharma | 서기 319~353년 |
Upinder Singh | 서기 319~335/336년 |
파탈리푸트라의 굽타 가문 출신으로, 쿠샨 왕조가 쇠퇴한 후 마가다국(마간다국)이 있던 현재의 비하르 주에서 부상했다. 마우리아 왕조를 세운 찬드라굽타의 기반 지역을 계승하고, 석가모니와도 연관이 있는 릿차비족 출신 왕비 쿠마라 데비를 맞아들여 지위를 굳혔다. 갠지스강 중류 지역을 정복하고 북인도를 통일하여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굽타 왕조를 건국하고, 마하라자디라자 (제왕 중의 대왕)를 칭했다. 320년을 굽타 기원으로 제정하여 이후 북인도에서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2. 2. 쿠마라데비와의 결혼
찬드라굽타 1세는 릿차비 공주 쿠마라데비와 결혼했다.[1] 릿차비는 고타마 붓다 시대에 현재의 비하르 주 바이샬리를 본거지로 삼았던 고대 씨족의 이름이다.[1] 쿠마라데비의 릿차비 왕국의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하지만, 역사학자 R. C. Majumdar는 찬드라굽타 시대에 릿차비족이 바이샬리를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1]
찬드라굽타 1세의 금화에는 찬드라굽타와 쿠마라데비의 초상과 함께 "Lichchhavayah"("릿차비족")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2][1] 그들의 아들 사무드라굽타는 굽타 비문에서 'Lichchhavi-dauhitra' (릿차비 딸의 아들)로 묘사된다.[3] 굽타 왕조의 여왕들 중 쿠마라데비를 제외하고는 아버지 쪽 가문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는 굽타 가문이 쿠마라데비와의 결혼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4]
고화폐 연구가 존 앨런은 찬드라굽타가 바이샬리를 수도로 둔 릿차비 왕국을 정복했으며, 쿠마라데비와의 결혼은 평화 조약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2] 그러나 굽타 가문이 릿차비족을 정복한 후 왕조의 동전에 릿차비족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반론도 있다.[5]
이 결혼은 찬드라굽타가 정치적 권력과 지배권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4] 동전에 릿차비족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굽타 세력 확장에 대한 그들의 기여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6] 결혼 후 찬드라굽타는 릿차비 영토의 통치자가 되었거나, 굽타와 릿차비 국가가 연합했을 가능성도 있다.[3]
3. 굽타 왕조의 확장
찬드라굽타 1세는 "마하라자디라자"(제왕 중의 대왕)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그의 왕국이 이전 굽타 왕들의 영토보다 상당히 넓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쿠샨 왕조가 쇠퇴한 후 마가다국(현재의 비하르 주)에서 부상했다. 마우리아 왕조를 세운 찬드라굽타가 기반으로 삼았던 곳을 계승한다는 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석가모니와 연관 있는 릿차비족 출신 왕비 쿠마라 데비를 맞아들여 지위를 굳혔다. 갠지스강 중류 지역을 정복하고 북인도를 통일하여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굽타 왕조를 건국했으며, 320년을 굽타 기원으로 제정하여 이후 북인도에서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찬드라굽타 1세의 영토 범위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지만, 대체로 서쪽으로는 프라야가(현재의 프라야그라지)에서 동쪽으로는 갠지스강, 북쪽으로는 네팔 접경 지역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왕국은 현재의 비하르 전체와 우타르프라데시 및 벵골 일부를 포함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왕조는 제2대 왕 사무드라굽타와 찬드라굽타 2세에게 계승되었다.
3. 1. 영토 범위에 대한 논쟁
찬드라굽타 1세의 영토 범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대 역사가들은 《푸라나》와 그의 아들 사무드라굽타가 발행한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의 정보를 바탕으로 영토 범위를 추정하려고 시도했다.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는 사무드라굽타에게 복속된 여러 왕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이 왕들의 신원을 바탕으로, 북부 벵골이 찬드라굽타 1세의 왕국에 속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무드라굽타에게 복속된 왕들의 신원이 논쟁의 대상이므로 이러한 결론은 확정적이지 않다.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의 정보를 사용하여 찬드라굽타의 왕국에 속하지 않았던 영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 서쪽: 찬드라굽타의 왕국은 프라야가(현재의 프라야그라지)를 크게 넘어서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무드라굽타가 현재의 우타르프라데시 서부의 왕들을 격파했기 때문이다.
- 남쪽: 찬드라굽타의 왕국은 중앙 인도의 마하코샬라 지역을 포함하지 않았다. 사무드라굽타가 이 지역의 삼림 지역 왕들을 격파했기 때문이다.
- 동쪽: 찬드라굽타의 왕국은 남부 벵골을 포함하지 않았다.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서 그 지역의 사마타타를 변경 왕국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델리 철기둥 비문은 그 지역의 방가 왕국이 후대 왕 찬드라굽타 2세에 의해 정복되었음을 시사한다.
- 북쪽: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은 네팔 (현재의 네팔)을 변경 왕국으로 언급한다.
《바유 푸라나》의 한 구절에서는 굽타가 사케타(현재의 아요디아), 프라야가, 마가다를 통치했다고 언급한다. 이를 바탕으로 찬드라굽타 1세가 이 영토들을 통치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바유 푸라나》는 특정 통치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므로 이 결론 역시 확정적이지 않다.
역사가 R. C. 마줌다르는 찬드라굽타의 왕국이 현재의 비하르 전체와 현재의 우타르프라데시 및 벵골의 일부를 포함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역사가 딜립 쿠마르 강굴리는 서쪽의 알라하바드에서 동쪽의 벵골의 갠지스 강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왕국을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남동 벵골, 남부 벵골, 동부 벵골 및 서부 벵골은 제외했다. 역사가 아슈비니 아가르왈은 중앙 및 동부 우타르프라데시와 비하르를 포함했지만 벵골은 포함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4. 화폐
찬드라굽타 1세의 것으로 여겨지는 금화에는 찬드라굽타와 쿠마라데비의 초상이 새겨져 있으며, "Lichchhavayah"("리차비족")이라는 문구가 함께 새겨져 있다.[6] 이들의 아들 사무드라굽타는 굽타 비문에서 'Lichchhavi-dauhitra' ("릿차비족 딸의 아들")로 묘사된다.[6] 굽타 왕조의 여왕들 중 쿠마라데비를 제외하고는 아버지 쪽 가문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는 굽타 가문이 쿠마라데비와의 결혼을 중요한 사건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6]
고화폐 연구가 존 앨런은 찬드라굽타가 바이샬리를 수도로 둔 릿차비 왕국을 정복했으며, 쿠마라데비와의 결혼은 평화 조약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을 제시했다.[6] 그는 굽타 가문이 릿차비족의 오랜 혈통 때문에 이 결혼을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겼다고 주장했다.[6] 그러나 고대 텍스트인 ''마누 법전''은 릿차비족을 "비정통적이고 부정한" 존재로 여긴다. 따라서 굽타 가문이 사회적 위신을 높이기 위해 사무드라굽타의 릿차비 혈통을 자랑스럽게 언급했을 가능성은 낮다.[6] 또한, 굽타 가문이 릿차비족을 정복한 후 왕조의 동전에 릿차비족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했을 가능성도 낮다.[6]
결혼은 찬드라굽타가 정치적 권력과 지배권을 확장하여 '마하라자디라자'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6] 동전에 릿차비족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굽타 세력 확장에 대한 그들의 기여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6] 결혼 후 찬드라굽타는 릿차비 영토의 통치자가 되었거나, 굽타와 릿차비 국가가 연합하여 찬드라굽타와 쿠마라데비가 각자 국가의 주권자로 여겨졌고, 아들 사무드라굽타가 통일 왕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될 때까지 연합을 유지했을 가능성도 있다.[6]
4. 1. 동전 발행 주체 논쟁
찬드라굽타와 쿠마라데비의 초상이 새겨진 금화는 마투라, 아야디아, 럭나우, 시타푸르, 탄다, 가지푸르, 바라나시 (모두 우타르프라데시주)와 라자스탄주의 바야나, 비하르주의 하지푸르에서 발견되었다.[6] 이 동전 앞면에는 찬드라굽타와 쿠마라데비의 초상이 굽타 문자로 그들의 이름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6] 뒷면에는 사자에 앉아 있는 여신이 묘사되어 있으며, "''Li-ccha-va-yah''"(
이 동전의 발행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화폐학자 존 앨런을 포함한 다양한 학자들은 이 금화가 사무드라굽타가 자신의 부모를 기리기 위해 발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6] 반면, 다른 사람들은 이 동전 발행을 찬드라굽타 본인에게 귀속시키거나,[6] 심지어 이 동전이 릿차비족에 의해 발행되었다고 주장했다.[6]
V. S. 파탁은 동전이 왕실 부부를 ''vaivahika''(결혼) 포즈로 보여준다고 이론화했지만, 동전이 왕실 결혼을 묘사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6] S.V. 소호니는 이 동전이 찬드라굽타가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쿠마라데비에게 작별을 고하는 모습을 묘사한다고 이론화했지만, 군사적 기량을 나타내는 구절이 없다는 점에서 의심스럽다.[6] 동전은 단순히 찬드라굽타와 쿠마라데비를 공동 통치자로 묘사했을 가능성이 높다.[6]
동전 뒷면에 나타나는 여성 인물의 정체는 불확실하다.[6] 사자에 앉아 있는 여성은 인도의 역사적 예술에서 여신의 특징이기 때문에 굽타 여왕이었을 가능성은 낮다.[6] A. S. 알테카르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여신을 두르가로 식별했다.[6] 그러나 두르가는 종종 사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이 속성은 그녀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락슈미 역시 사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왔다.[6] 존 앨런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동전의 여신을 행운의 여신이자 비슈누의 아내인 락슈미로 식별했다. 그녀는 굽타 왕실의 번영을 상징하거나 바이슈나바적 제휴를 나타내는 표지로 동전에 등장했을 수 있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6] 여신은 또한 이미지 아래에 그녀의 이름이 나타나는 릿차비족의 수호 여신이었을 수도 있지만, 역시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6]
5. 후계자
찬드라굽타 1세는 아들 사무드라굽타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는 찬드라굽타 1세가 사무드라굽타에게 "세상을 보호"하도록 임명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 이후 왕조는 사무드라굽타와 찬드라굽타 2세에게 계승되었다.
5. 1. 카차 왕위 계승 논란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과 사무드라굽타의 에란 석비에는 그의 아버지 찬드라굽타 1세가 그를 다음 왕으로 선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는 찬드라굽타 1세가 사무드라굽타를 "세상을 보호"하도록 임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찬드라굽타 1세가 노년에 왕위를 포기하고 아들을 다음 왕으로 임명했음을 시사한다.[1]카차라는 이름의 굽타 통치자가 발행한 동전이 발견되면서 찬드라굽타 1세의 후계자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한 이론에 따르면 카차는 사무드라굽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또 다른 이론은 카차가 사무드라굽타의 형이었고 아버지 찬드라굽타 1세의 뒤를 이었다는 것이다.[2]
『바비샤요타라 푸라나』의 『칼리유가-라자-브리타타』 부분에는 카차가 리차비 공주 출신인 찬드라굽타 1세의 아들이라고 언급되어 있다.[3] 이 부분은 카차가 아버지와 공동 통치했다고 묘사하며 사무드라굽타가 그들의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언급한다.[4] 그러나 이 구절(그리고 아마도 전체 텍스트)은 현대에 위조된 것이다.[5]
참조
[1]
서적
The Gupta Empire
https://books.google[...]
Motilal Banarsidass Publ.
1997
[2]
서적
Encyclopedia of Ancient Asian Civilizations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2014
[3]
서적
The Coins of India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1987
[4]
서적
Chapter 11 – The Gupta Empire and the Western Satraps: Chandragupta I to Kumaragupta I
https://www.ibiblio.[...]
[5]
서적
Corpus Inscriptionum Indicarum Vol. 3
https://archive.org/[...]
1888
[6]
서적
Catalogue of the coins of the Gupta dynasties
https://archive.org/[...]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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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8]
서적
Encyclopedia of Ancient Asian Civiliz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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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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